성서 40주간 묵상 4 - 성전 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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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cco del Caravaggio - Christ Driving the Moneylenders out
출처 : 가톨릭일꾼(http://www.catholicworker.kr)
성서 40주간 묵상 4 - 성전 정화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요한 2,13-16)
이 장면은 아마도 복음에서 유일하게 예수님이 폭력을 쓰신 사건이 아닌가 생각된다. 예수님은 잘못이나 불의를 보면 한탄하며 말로 꾸짖으며 옳은 길을 가르쳐 주셨다. 결코 단죄를 하지 않으셨다.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를 대하는 경우에도 그러했고 (마태23,1-36), 간음하다 붙잡혀 끌려온 여인 (요한 8,1-11) 을 다루시는 모습도 그렇다. 또한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지으면 단둘이 만나 타이르고 (마태 18,15)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며 (마태 18,32) 당신 복음의 기조가 되는 사랑과 용서를 항상 보여 주셨다. 자신의 고향에서 자신을 믿지 않는 것을 보시고는 놀라셨지 화를 내거나 섭섭해 하지 않으셨다 (마르코 6,6).
그러나 성전에서 장사를 하는 모습은 참을 수 없으셨던 것 같다. 채찍으로 쫓아내고 탁자를 엎어 버리셨다. 당시 사회에서 공인된 죄인들인 세리와 창녀들과는 함께 식사를 하고 남편을 다섯이나 가지고 있던 사마리아 여인과도 스스럼 없이 대화를 나눈 너그러운 분이 무엇때문에 이렇게 평정심을 잃었을까?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 신앙 생활에서 예루살렘 성전은 아주 중요했었다. 하느님이 거주하신다고 믿은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이 1년에 한차례 대속죄일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유다인들은 3대 순례축제일에 성전으로 순례를 해야 했고 해마다 성전세로 반 세겔 (두 데나리온)씩을 바쳐야 했었다. 유다인들은 또한 하느님이나 이웃에게 죄를 지으면 속죄의 제물을, 부정한 짓을 하거나 병에 걸리면 깨끗이 되기 위해 희생 제물을 바치게 되어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에루살렘 성전은 유다인들 신앙 생활의 중심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 각자의 마음 안에 계시고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여기 현실 속에 있다고 지속적으로 말씀하신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은 대부분의 유대인들과는 달리 성전 건물 자체를 그렇게까지 신성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하시지는 않았을 것 같다. 성전을 허물면 내가 사흘 만에 새로 짓겠다고 하신 것도 예수님이 생각하는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성전 건물의 중요성이 그리 크지도 않았는데 왜 예수님은 이렇게 폭력적일 정도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분노하셨을까?
당시 유대교의 신앙 생활을 고려해보면 성전은 예수님에게 하느님과의 만남을 상징하는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예수님에게는 성전이라는 건물이 중요해서 정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만남이 정결하고 순수해야 하고, 그 만남의 과정을 누구도 개인의 이익을 위해 이용해서는 안된다는 점이 이 사건에서 강조되고 있다고 묵상을 한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과 관련된 비리는 널리 알려져 있다. (카톨릭 일꾼, 나무 위키, Wikipedia 참조)
속죄와 희생의 제물로 바치는 동물은 흠이 없어야 하는데 그 판정을 성직자가 하였다고 한다. 직접 가져온 제물에 흠이 있다고 퇴짜를 놓아 어쩔 수 없이 성전에서 파는 제물을 사야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성전에서 파는 동물은 가격이 상당히 높았다고 한다. 당시 노동자의 통상 하루 임금이 1 데나리온이었는데 가난한 이들이 선택하는 비둘기가 1 데나리온, 숫양은 8 데나리온, 송아지는 20 데나리온 정도였다고 한다. 명절때는 이 가격이 폭등하여 비둘기 한 쌍이 25 데나리온까지 오른적도 있었다고 하니 그 폭리를 짐작할 수 있다. 명절을 지내러 제국의 변방에서 며칠 걸려 달려온 이들은 비싼 값을 치르더라도 순례를 헛되게 만들지 않기 위해 이 동물들을 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성전세는 로마 은전이 아니라 ‘두로’ 지역의 화폐인 세겔로 내도록 했다. 당시의 로마 제국에서 통용되는 화폐는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의 초상이 새겨진 동전이었다. 성직자들은 로마 화폐를 사용하는 것은 율법으로 금지된 우상숭배이니 정결한 성전 내부에서는 사용하면 안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러나 세겔의 앞면에도 멜카르트(헤라클레스) 신이 새겨져 있어 그 이유는 합당치 않았었다. 학자들은 세겔이 통용되었던 이유는 은이 평균 90% 함유되어 다른 화폐들 보다 은 함유량이 더 많은 은전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결국 세겔은 ‘종교적 선택으로 포장된 상업적 결정’이라는 것이 이 학자들의 생각이다. 또한 이 환전 과정에서도 환전상들은 폭리를 취했다고 한다.
성전 경제는 경쟁이 허용되는 시장경제가 아니었다. 모든 상행위는 대제사장과 성전 관리자에게 인가를 받아서 이루어지는 독점 경제였다. 이 독점 경제의 이득은 대제사장을 비롯한 성전 귀족들이 누렸다.
예수님은 당시 하느님과의 만남을 의미하는 유다인들의 성전 방문에서 그 만남을 성스럽고 정결하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성직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그 기회를 이용하는 상황을 용납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의 도우미들인 제물 장사꾼과 환전상들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고통에 시달릴 때 하느님을 찾는 절실함을 생각하면 성전에 열심히 오는 사람들 가운데 다수가 아주 힘든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런 어렵고 취약한 사람들을 상대로 하느님을 빙자해서 사리 사욕을 채우는 광경을 예수님이 견디시기 힘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을 ‘강도의 소굴’ (마태21,13) 이라고 부르셨다.
또한 당시 유대교 전례의 중심은 제물을 바치는 예절을 통해 죄를 용서 받는, 어찌 보면 하느님과 거래를 하는 관계였음을 볼 수 있다. 예수님 복음의 중요한 메세지가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는 조건 없는 선물이지 절대로 제물이나 공덕에 따라 받게 되는 거래관계가 될 수 없다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예절도 받아 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하느님을 팔아 사욕을 채우거나 제물을 받고 속죄를 해주는 문제는 예수님 이전에도 있었고 예수님 이후에도 계속된 것 같다. 구약의 예레미아 예언서에는 가짜 예언자들과 사제들의 비리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8,10-12). 호세아 예언서에도 “그들은 내 백성의 속죄 제물을 먹고 살며 내 백성이 죄짓기만 간절히 바란다” (4,8) 라고 사제들을 꾸짖고 있다. 16세기 종교 개혁의 원인 가운데 하나가 성 베드로 대성당 축조를 위한 면죄부 판매에 있었던 것을 보면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님을 분노하게 만든 문제가 예수님의 교회안에서도 똑같이 일어났음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문제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는 것을 알수 있다. 한국의 개신교에서는 일부 교회가 수백억 또는 수천억의 돈을 걷어 화려한 예배당을 세워 신도들을 유혹하여 초신자들이 성숙한 신앙을 알기도 전에 성전주의, 예배주의, 성장주의와 함께 기복신앙부터 먼저 배우게 된다고 우려하고 있다 (신성남, 예배로 영업하는 교회). 미국의 카톨릭도 성전의 정결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많은 교구가 성당에서 행해진 사제의 아동 성추행 문제로 인해 소송을 당하고 있고 몇몇 교구에서는 재정적 책임을 감당할 수 없어 파산을 고려한다는 기사도 볼 수 있다. 구글에 “오클랜드 교구 (Diocese of Oakland)” 를 입력하면 교구를 상대로 소송을 해주겠다는 법률 사무소 광고가 제일 먼저 뜨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복음에 그려진 예수님은 병든 몸과 마음을 고쳐주는 치유자이며 말씀과 행동으로 옳은 길을 가르치시는 인자한 선생님 같은 분이시다. 그런 예수님이 유일하게 화를 내고 폭력을 쓰게끔 만든 원인에 대해 우리는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에게 예루살렘 성전은 하느님과의 만남을 상징하는 곳이었고 그 만남은 정결하게 이루어져야만 했다. 제물을 주고 은총을 받는 거래관계로 상업화되거나 만남을 도와주는 사람들의 개인 욕심을 채우는데 이용되는 것은 결코 용납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이 성전 정화 사건은 이러한 당신의 뜻을 분명히 새겨 둘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사건이라고 다시 한번 묵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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