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40주간 묵상 1 - 포도주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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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40주간 묵상 1 - 포도주의 기적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Marriage at Cana, c. 1500, Gerard David, Musée du Louvre, Paris)
예수님께서 일꾼들에게 “물독에 물을 채워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물독마다 가득 채우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시, “이제는 그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어라.” 하셨다. 그들은 곧 그것을 날라 갔다. 과방장은 포도주가 된 물을 맛보고 그것이 어디에서 났는지 알지 못하였지만, 물을 퍼간 일꾼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과방장이 신랑을 불러 그에게 말하였다. “누구든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취하면 그보다 못한 것을 내놓는데,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 두셨군요.” (요한 2,7-2,10)
요한 복음 사가는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만든 기적을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하며 행한 첫번째 기적으로 선택하였다. 이 기적은 우리들에게 신앙생활의 촛점을 어디에 두어야하는지를 알려주는 뜻깊은 메세지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신앙 생활을 잘하고 있는가의 척도를 신앙 행위를 잘하고 있는가로 가늠하는 경향이 있다. 즉 주일 미사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성사를 보고, 교무금을 내고, 특별 헌금을 내는 것 등의 신앙 행위를 얼마나 충실히 실행하고 있느냐에 따라 판정을 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런 신앙 행위들을 열심히 실행하는 것은 바람직하고 중요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보다 더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이 있음을 포도주의 기적을 통해 알려 주시는 것 같다.
신앙 행위는 하나씩 행해지는 개별적인 행동 (transaction) 이지만 포도주의 기적은 물독에 담긴 물 전체가 술로 바뀌는 변형 (transformation) 이다. 이것은 우리들 삶에서 의식의 틀이 바뀌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의식의 틀이 바뀌어 지면, 그에 맞는 행위는 자동적으로 따르게 된다고 생각한다. 요한 복음 사가가 예수님의 첫번 째 기적을 포도주의 기적으로 부각시킨 것은 우리들에게 의식의 틀을 더 높은 수준으로 바꾸는 것이 신앙 생활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묵상이 된다.
부자 청년 이야기는 모든 공관 복음서에 나온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계명을 잘 지키라고 하신다. 그가 그런 것들은 다 지켜왔다고 하자 예수님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에게 주라고 하셔서 그는 울상이 되어 예수님을 떠났다. 많은 재산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진 것을 모두 팔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 가지고 있는 틀을 버리고 새로운 틀로 바꾸라는 의미로 묵상이 된다. 그래야 당신의 가르침을 온전히 따를 수 있다고. 이 부자는 계명을 지키는 신앙 행위는 충실히 할 수 있었지만 근본적인 의식의 틀을 바꾸기는 아직 준비가 안된 상태였을 것이다.
행위는 완료형이지만 변형은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진행형이다. 그래서 영적 성장은 장거리 여정이다. 성서 40주간의 요한 복음 강의에서 수녀님은 요한 복음에는 믿음이라는 명사는 안 나오고 믿는 과정에 관련된 단어가 98번 나온다고 하셨다. 포도주의 기적이 요한 복음에만 나와 있고 나는 그 기적을 영적 의식 틀의 변형으로 묵상하였기에 요한 복음 사가가 믿음을 과정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상당히 수긍이 된다.
그렇다면 의식의 틀을 변형시키는 영적 성장의 과정을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영혼의 성”에 대한 이해가 도움이 되리라 본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우리의 영적 성장 과정을 일곱개의 궁방이 있는 성의 중심에 계시는 하느님을 만나러 가는 기도의 여정으로 묘사하고 있다. 맨발 가르멜 수도회 윤주현 신부님의 연재물인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 생활” 중에서 기도생활에 대한 결론 부분을 요약해 봤다.
성녀 데레사가 초대하는 기도의 여정은 ‘합일의 기도’라고 불리는 단계에서 정점에 이른다. 성녀는 이 단계를 하느님과 영혼이 합일하는 정도에 따라 (1) 단순한 합일 (5궁방), (2) 충만한 합일 (영적 약혼, 6궁방), (3) 변모적 합일 (영적 결혼, 7궁방)로 나눈다.
성녀는 인간이 하느님과 합일할 수 있는 것은 신비적이나 의지적인 두 가지 방식으로 가능하다고 보았다. 신비적 합일은 하느님이 원할 때, 원하는 사람에게 원하는 만큼 허락하는 것으로서 인간의 노력과 공로가 크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길을 통해 주님과의 합일에 이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성녀는 신비적 방식을 통해 하느님과 합일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의지적 합일을 이루기 위해 힘쓰도록 권했다. 의지적 합일은 복음서에서 주님이 권고하는 최고의 계명, 즉 혼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실천함을 의미한다.
우리가 얼마나 하느님을 사랑하는지에 대해서 식별할 수 있는 객관적인 지표는 애매모호하다. 그래서 성녀는 우리의 ‘이웃 사랑’을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 정도를 가늠하는 척도로 보았다. 이런 맥락에서 참된 이웃 사랑이 우리를 하느님과의 의지적 합일로 이끄는 관문이라고 소개한다. “슬퍼하는 사람이 있으면 같이 슬퍼하고, 필요하다면 남을 먹이기위해서 여러분은 굶으십시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과 하나가 되는 진정한 합일입니다” (5궁방 3,11) 그러므로 이웃 사랑만 제대로 실천해도 누구나 이 의지적 합일을 통해 5궁방의 단순한 합일까지는 어렵지 않게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 궁방인 7궁방에 도달했다 해서 하느님에 대한 관상에만 몰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오히려 관상가일수록 철저히 현실의 삶에 투신해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고 적극적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활동가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복음에 나오는 마리아와 마르타의 비유를 들어 마리아가 예수님을 관상하는 좋은 몫을 선택한 것은 맞지만 마리아와 마르타는 언제나 함께 가야 한다며 두 노선 사이의 균형을 잡아주고 있다. (7궁방 4,13-16)
윤 신부님의 설명을 보면 성녀 데레사는 영적 성장과 이웃 사랑의 실천이 서로 상승적 영향을 주고 있다고 하며 우리에게 이웃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영적 성장은 관념적 성장이 아니라 사랑의 행위를 실천함으로써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마태 7,21) 고 하신다. 그러나 오늘날의 많은 크리스챤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대신 예수님을 숭배만 하는 경우가 많다고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Richard Rohr 신부는 지적한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라고는 여러번 말씀하셨지만 한번도 당신을 숭배하라고 한적은 없었다고 우리시대의 영성 지도자인 Rohr 신부님은 말한다.
포도주의 기적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신앙 생활의 촛점을 더 높은 의식 수준의 틀로 변형시키는데 맞추어야 함을 가르치신다고 묵상한다. 의식의 틀 수준이 영적으로 성숙해질수록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모두에게 조건없이 선물로 주시고,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소중한 자녀라는 것을 더욱 선명히 깨닫게 될 것이라 본다. 그리고 그러한 명확한 인식은 우리로 하여금 이웃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실천하여 하느님의 계명을 더욱 잘 따르도록 인도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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