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북가주 세크라멘토에서 열리는 성령 쇄신대회에 다녀왔다. 미국 생활을 시작한 뒤 남가주에 있을 때나 현재 살고 있는 북가주에서나 해마다 열리는 성령쇄신대회에는 꼭 참석한다. 영적 목마름의 해갈을 위해서다. 성령쇄신대회에 다년 온 뒤 한결같은 주위의 반응이 너무 재미있다.
성령 받았어요?
나는 절대로 안 돼요!
나는 그런 분위기가 싫어요!
그런 반응을 보면 성령에 대한 인식이 잘못되어 있는 게 아닌가 라는 의구심을 가지게 된다.
세례를 받은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세례의 그 순간에 성령을 받아 새롭게 태어난다. 그리고 천주교 신자라면 적어도 하루 수 차례 성호를 그으며 성령의 이름을 부른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미 성령을 충분하게 받았고 성령 안에서 살고 있다는 말이다.
성령의 정체를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설명하지는 못해도 성령이 하느님의 영이며 그리스도의 협조자요 또한 우리를 진리의 길로 안내하는 길잡이라는 사실은 대부분 다 알고 있다.
성령의 도움 없이는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 고백할 수도 없다는 말씀은 성서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면 왜 성령대회나 성령 기도모임에 거부감을 느끼게 되는 것인가.
아마도 성가의 리듬에 맞춰 손뼉을 치거나, 두 손을 치켜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분위기, 심령언어, 성령 안수 시간에 레스팅(뒤로 넘어지는 행위) 하는 모습에 대한 거부감인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면 성령대회의 분위기는 천주교 신자들의 대명사 격인 '점잖음과 고상함'과는 분명 거리가 있다.
다윗은 아마포 에폿을 입고 온 힘을 다 하여 주님 앞에서 춤을 추었다(사무엘2 6,14).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주신 주님의 궤를 예루살렘의 다윗 성으로 옮길 때 다윗 왕과 온 이스라엘 집안은 함성을 올리고 나팔을 불어 주님을 찬양하였고 다윗은 ‘온 힘을 다 하여’ 춤을 추었다. 체면이나 점잖음보다는 주님을 찬양하는 게 우선이라는 말이다. 부모라면 과묵하고 점잖은 자식보다는 눈앞에서 귀염 떠는 자식이 더 예쁜 법이다.
성령쇄신대회는 쇄신, 이라는 말 그대로 묵은 것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크리스천이라면 매일 매 순간 죽었다가 새롭게 부활해야 한다. 하지만 말이 그렇지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안타깝게도 하느님은 너무 멀리(?) 계시고 세상의 유혹과 욕망은 너무 가깝게 있다. 그러다 보니 주일미사나 간신히 참례하고 기도생활도 형식에 치우치기 십상이다.
물로 세례를 받았을 뿐아니라 성령의 옷을 입고 성령 안에서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새로움의 인식'이다.
습관적으로 또는 형식적으로 이름을 부르는 동안 내 영혼의 외적인 세계로 밀려나서 퇴색되어 가던 성령을, 그 힘을, 지혜를, 사랑을, 다시금 인식하면서 내 안에서 활동하시도록 안내하는 곳이 바로 성령 쇄신대회인 것이다.
성령세미나 혹은 성령쇄신대회 이후 자주 기도모임에 참석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늘 새롭게 나를 변화시키고 다듬고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기도하고 성령의 도움을 청해야 하기 때문이다.
안수 시간에 레스팅(resting)을 하는 건 성령께서 영혼의 휴식을 주시는 것이다. 하지만 레스팅이 되고 안 되고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성향일 뿐이지 성령을 받고 안 받고와는 상관이 없다.
내적 외적인 치유와 회개가 이루어져 눈물을 흘리거나 개중에는 과격한 행동으로 통곡을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순가.
하느님께서는 그 모두를 수용하여 당신의 쓸모 있는 재목으로 녹이시는 사랑의 용광로이신 것을.
마음의 문을 열면, 고집과 편견을 버리면 좋은 것을 넘치도록 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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