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존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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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첫날은 재의 수요일이자 발렌타인 날이기도 하다. 겨우내 움츠렸던 땅에서 새 생명을 잉태하는 봄의 소리에 축복을 보낸다. 연초록 들판은 한순간에 금잔화와 유채화로 덮인 풍경으로 바뀌었다. 환희의 색깔이다. 오늘 Florida 어느 고교에서 같은 학교를 다니던 십대가 쏜 총에 맞아 17명의 아이가 풀잎처럼 쓰러졌다. 뉴스엔 한 여인이 살아남은 딸을 안고 울음을 억지로 참으려는 사진이 나온다. 그 여자의 이마에 굵게 재로 새겨진 십자가 또렷했다. 나는 성호경을 그었다. 어쩜 그 여인은 살아남은 딸을 안고 하느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하기엔, 쓰러진 아이들에게 미안해서 울음을 가슴 저 밑바닥으로 삭이려 했는지 모르겠다. 하필 이날, 하느님께서는 꽃도 피워보지 못한 아이들에게 초콜릿 화관을 씌워주시려고 먼저 데려가셨을까. 그러나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은 무엇으로 이겨낼 수 있을지 뉴스를 보는 가슴이 먹먹하다. 해마다 이날이 오면 그 학교의 누구라도 돌아보고 싶지 않은 잔인한 발렌타인데이일 것이다. 삶과 죽음이 그리 멀리 있지 않은 것 같다. 아침에 학교 다녀오겠다고 다정하게 인사하고 떠난 사랑하는 아이들이 안전하다고 여기는 장소에서 한순간에 쓰러졌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가 언제부터인가 불안한 장소로 바뀌고 있다. 그렇다고 집 안에서만 머물 수는 없다.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가족과 평범한 저녁을 맞는 일상에 감사해야 한다. 나는 재의 수요일 저녁 미사를 위해 성당으로 향했다. 이마에 재로 십자를 바르고 제 자리로 돌아와 17명의 영혼 안식을 위해 잠시나마 기도를 했다. 아울러 가족과 주변의 모든 사람이 안전한 삶이 되도록 염원했다.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 (지혜 11, 26), 생명의 존귀함을 성찰하는 마음을 갖게 하여 주십시오. 겸허한 마음을 갖게하여 주십시오. 프란시스코 교황님께서 제안하는 사순시기 양심성찰에서, 우선 사순 첫 주 아주 사소한 것부터 정리를 해나갈 계획이다. 최근 게으름으로 한동안 돌보지 않았던 화분부터 정리해야겠다. 메말랐던 수국에서 새순이 돋아나고 있다. 생명의 은총에 감사한 마음을 배운다. 바다와 산과 들이 어우러진 축복받은 이 땅 위에서 사순절을 힘차게, 기쁨으로 받아들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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