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 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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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물과 휴대폰만 들고 집을 나섰다. 묵주 없는 빈 손이 허전했으나 어느 면에선 홀가분한 기분도 들었다. 사물을 마음의 눈으로 보면서 하느님을 느끼는 것, 마음이 가는 대로 여기 저기 살피면서 느끼는 내 감성을 사진으로 남기기도 하고 어느 한적한 곳을 찾아 마음의 귀를 열고 자연의 소리를 듣는다. 그렇게 일주일에 한 번 혹은 한 달에 한 번 기회를 잡아 자연을 즐기다가 집에 돌아온 뒤 단상을 기록에 남기거나 블로그나 카페 혹은 SNS에 올려 이웃과 나눈다. 굳이 삶의 현장을 떠나 한적한 곳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 삶의 한 복판에서 모든 사람, 모든 사물 안에서 하느님을 느끼고 보는 시간이라는 의미에서 길거리 피정은 매우 매력적이다. 한국에서는 이미 길거리 피정이 많이 알려져서 특정 사제의 지도로 동호회도 생기고 단체로 길거리 피정을 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나는 어느 날 잠이 안 와서 새벽에 컴퓨터를 열었다가 길거리 피정 사이트를 발견하게 되었다. 금년에는 5월까지 비도 잦았고 이런저런 이유로 호수 공원 산책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런 탓인지 빛 조각들이, 산들바람의 감촉이 모공 하나하나에 상쾌하게 스며든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사물 모든 사람이 존재 자체로 아름답게 빛이 나는 듯하다. 이리 저리 눈길 닿는 곳마다 마음 속으로 탄성을 지르며 하느님을 찬미하지 않을 수 없다. 호수 공원 안에 자리잡은 아담한 정원을 나는 특히 좋아한다. 가든 안에 거의 지정석이 되다시피 한 곳에 앉아 새소리 바람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천국이 따로 없다. 비가 잦아 잡풀마저 얼마나 싱싱한지 나 좀 봐 줘요, 하는 듯 고개를 들고 자태를 뽐낸다. 몸을 낮추고 들여다 보니 아주 하찮아 보이는 풀이 좁쌀 알만한 꽃을 피우고 당당하게 하늘을 향해 웃음을 머금고 있다. '밉게 보면 잡초 아닌 풀이 없고, 곱게 보면 꽃 아닌 사람이 없으되….'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정약용과 나태주 시인의 안목과 통찰력이 새삼스러운 감동으로 가슴을 울리는 것도 이런 시간이다. 길거리 피정은 사유의 시간이기도 하다. 무심하게 지나쳤던 주변을 자세히, 깊게 돌아보며 창조주의 섭리와 나의 존재 의미를, 소명을 다시금 되새기기도 한다. 지난 사순 시기에는 유난히 통증에 발목이 잡혀 있었다. 겉모습은 멀쩡해도 여기 저기 아픈 데가 많아 우울 모드에 한 발짝씩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하면서 은근히 ‘기적’을 바라기도 했다. 수난 시기에 이렇게 힘들었으니 부활미사와 함께 짜잔! 하고 아픔이 사라지는 당치도 않은 기적 말이다. 기적이야 우리 일상에서 매일 매 순간 이루어지는 걸 평생 체험했으면서도 그런 심정이었다. 물론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고 부활시기를 지나 성령강림을 맞았다. 허리와 양쪽 손목에 밴드를 하고 선 채로 키보드를 두들기는 이 순간, 통증을 통해 눈을 좀더 밝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한다. 내 주변에 혹은 내가 알 수 없는 곳에서 육체의 통증에 시달리는 모든 환자들이 고통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 씩씩하고 밝게 살아가기를 기도한다. 비로소, 이제야 나는 마음으로 부활한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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