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 안의 예수와 유다

작성자

김관숙 크리스티나

작성날짜

09-30-2018 Sunday
 

 

 레오나르드 다빈치가 밀라노의 한 수도원에 남긴 ‘최후의 만찬’을 제작할 때였다.

 다빈치는 예수님 얼굴의 모델을 찾기 위해 수 개월을 헤맨 끝에 안넬로라는 청년을 만났다.
그는 힘이 있으면서도 부드럽고 영적으로 빛이 나는, 다빈치가 원하는 이미지에 가까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빈치는 반가워하며 그를 수도원으로 데리고 가서 예수님의 얼굴을 완성시켰다.
 그 일 년 후 다빈치는 유다의 얼굴 모델을 찾아 나섰다. 마침내 어느 어두운 길에서 모델이 될만한 청년을 만났다. 그를 수도원으로 데리고 가서 유다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다. 헌데 이 청년이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었다. 그 이유를 묻자 청년은 자기가 일 년 전에 예수님의 모델이 되었던 안넬로라 고백했다.

 일 년 동안 안넬로라는 청년에게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니, 고작 일 년 사이에 예수의 얼굴에서 유다의 얼굴로 변하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그 청년의 마음 안에는 진작부터 예수와 유다가 함께 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앙드레 모르아는 '한 여성 안에는 백 명의 가능한 여성이 있다'고 말했다. 천사와 악녀, 요조숙녀와 창녀, 순진함과 교활함, 위선과 진실 등등. 환경과 상황에 따라 천사도 되고 악녀도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어디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일이겠는가. 때와 장소에 따라 혹은 상황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변하는, 아니 적당히 변해야 살 수 있는 게 인간 세상이다.
 사랑하는 자식들의 보호자가 되어야 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로써의 얼굴과 경쟁사회에서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 얼굴이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체면치레를 해야 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와 허물없는 친구를 만났을 때 그리고 혼자 자유로운 시간을 보낼 때의 모습은 분명 다르다. 그렇다고 그 어느 것이 위선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게 모두 인간의 진실된 모습이니까. 그래서 인간은 문학작품의 영원한 테마가 되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성선설을 주장하는 맹자나 성악설을 주장하는 순자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 밭에는 선을 향한 성정 외에 악을 향한 성정 또한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예전 학원에서 학생들에게 논술 지도를 할 때였다. 수업을 시작하는 날부터 아이들의 이기심과 인색함이 눈에 거슬렸다. 옆에 학생이 지우개나 연필을 빌려달라고 해도 외면하고 심지어는 쵸콜렛을 주머니에 넣고 와서 몰래 야금야금 먹는 녀석도 있었다. 독서와 글짓기 중심의 기본 프로그램 이외에 나는 아이들에게 인성에 도움이 될만한 것을 가르치려고 애썼다. 그들에게 세상에 존재하는 아름다움과 나눔의 기쁨을 알게 해주고 싶었다.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아 아이들은 가진 것을 나누게 되었고 서로를 배려하는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발전했다.

 평온하게 매 순간 최선을 다 해 살려고 노력하지만 늘 그렇게 되는 건 아니다. 아침에 화창하던 마음이 사소한 외부의 자극에 우울 모드로 곤두박질 치기도 하고 절망에 깊숙이 발을 담그고 있다가도 누군가의 따스한 말 한마디에 힘을 얻고 불끈 솟아오르는 태양을 보기도 한다.

 어린이나 청소년들은 교육과 사랑으로 선을 향해 걸어가도록 인도할 수 있다. 하지만 성인이 된 뒤에는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 길을 혼자 가야 한다.

 예수의 얼굴로 사느냐 유다의 얼굴로 사느냐 하는 건 전적 자신의 몫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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