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우 이야기 제12편] 사도 바오로의 발길을 따라... 그리스 터키 성지순례 2015-4/13-24
앞줄: 소피아, 로사리아, 안토니오, 스텔라, 베네딕다, 베네딕다 친구
뒷줄: 글라라, 베로니카, 아그네스, 바실리오, 카타리나, 그라시아, 사비나, 골롬바, 요한, 카타리나, 미카엘라, 안토니오
기사제공: 이정연 골롬바 / 사진제공(김휘 안토니오)
제목: 사도 바오로의 발길을 따라... 그리스 터키 성지순례 2015-4/13-24
작년부터 계획해 왔던 그리스 터키 여행,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4월 13일 출발이다.
남자 4 여자 14 총 18명. 공항에서 만나, 모두 조금씩은 들뜬 기분으로 서로 인사를 나눈다.
그날은 마침 터키공항사가 샌프란시스코와 이스탐불 첫 직항노선을 개항 하는날, 우리들이 첫 손님들이다. 다른 승객들도 오늘을 기다렸는지 유난히 긴 줄이다.
기다림의 인고는 즐거운 여행의 기대감과 비례하리라 위로하며 비행기를 탄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저녁 8시에 출발해 이스탐불 저녁 8시에 도착했다.
안내원인 조베드로(카톨릭 신자다)씨의 안내로 공항에서 호텔까지 가는 동안 도로옆에는 온갖 색갈의 예쁜 튜울립들이 화사하게 우리를 반겨준다.
이스탐불은 지금 튜울립의 축제 기간이란다. 내일을 위해 일찍 잠을 청한다.
다음날 아침 이스탐불 시내 관광에 나선다. 터키에서 가장 큰 도시로 인구 1500만명이 사는 유일하게 유럽과 아시아사이에 위치해 있는 도시다. 교통체증이 전세계 2위로 교통질서도 없고 사고가 나도 벌금이 없단다.
국민의 90%가 이슬람교도로 돼지고기를 안 먹는다.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공존하는 독특한 건축 양식을 가진 세계에서 5번째로 큰 성소피아사원을 본다. 돔 구조로 철근이 없는 형태로 건축되었고 처음엔 비잔틴 그리스정교회로, 후에 500년간 이슬람 사원으로 쓰이다가 현재는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그 옆에 세계 유일의 6개 첨탑과 푸른 타일의 각기 독특한 문양을 가진 블루모스크성, 로마시대 전차 경기가 열렸던 히포드럼, 이집트에서 갖고 왔다는 오벨리스크등을 본다.
성소피아 사원 부근의 있는 에니치성당은 군사막사로 쓰였기 때문에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장한나의 연주회가 이곳에서 열렸다고 한다. 유럽과 아시아를 가르는 보스포러스 해협에서 유람선을 타고 배위에서 아름다운 이스탐불을 본다.
5000개의 상점이 밀접해 있다는 그랜드 바자르(옥내시장)는 15세기에 건설되었고 18개의 출입구로 이루어져 있다. 자칫하면 길을 잃을 수도 있으니 조심하란다. 지하물 저장고를 본다.
다신교 시대의 신전에서 가져온 336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고 마치 궁전처럼 보인다고 해서 지하궁전으로 도 불린다. 맨끝쪽의 기둥밑에 거꾸로 눌려있는 두 메두사의 얼굴이 섬뜩해 보인다. 밑에는 물고기들이 유유히 헤엄치고 다닌다. 한 기둥에 사람들이 모여 조그만 구멍 에 손들을 넣고 있다. 그안에 엄지손가락을 넣고 돌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단다. 얼마전 꽃미남 배우인 이승기도 이곳에 와서 손을 넣었다고 한다.우리들도 손가락을 넣어본다.
다음날 아침 일찍 보스포러스 대교를 지나 이스탐불 공항으로 이동하여 카이세리로 간다.
보스포러스는 흑해와 마르마라해를 잇는 해협으로 터키에서 가장 비싼 주거지역이기도 하다. 도착후 일명 스머프의 모형으로 유명한 카파도키아로 이동한다.
전지역이 마치 거대한 야외 박물관 같은 신기한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단다. 1300m 고원지대에 사암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손으로도 파낼수 있는부드러운 바위들로 이루어져있다.
많은 집들이 바위를 파서 만들어졌고 신앙인들이 숨어 살기 좋은곳이어서 박해를 피해 신앙생활을 영위한 공동체의 모습을 간직한 괴레네 박물관( 성바실리오성당, 성바르나바성당등이 있다)
신앙 공동체를 위해 건설한 지하도시인 데린구유, 마치 로마의 카타콘배를 연상시킨다. 한참을 내려가보면 십자가 형태의 교회가 있다. 돌아 나와서 올라가는길, 숨이 가빠온다.
얼마나 힘든생활들을 했을지 잠시 숙연해진다. 데린구유 순례후 성서상의 이코니온인 콘야로 이동한다.
셋째날이다. 바오로 기념성당순례후 피시디아 안티오키아로 이동하여 또 다른 바오로기념 성당터를 본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일곱개의 교회를 보면
(1)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신앙으로 요한사도의 질타를 받은 라오디게이아
(2)가난하지만 인심이 넉넉했고 형제 사랑을 실천했던 필라델피아
(3)실크로드의 종착지로 부유한곳이었으나 영적으로 부패했던 사르디스
(4)이세벨을 그대로 놓아둔것에 대한 책망을 받은 티아디라
(5)인내심과 용기는 격려 받았으나 하느님에 대한 첫사랑을 잃어버린 에페소
(6)유대인들에게 받는 비방과 고통을 두려워 말라는격려 말씀을 받은 스미르나
(7) 의학의 도시이며 지식에 의존해 이단에 물드는 것을 경계받았던 페르가몬
7개 교회의 공통점은 잘못은 있을수 있지만 회개하면 용서받을수 있고 기다리고 있다는 하느님의 사랑을 볼수있다.
라오디게이아, 사르디스, 티아디라, 페르가몬을 본다.
대부분 터만 남아있지만 그시절을 엿볼수 있다.
목화의 성으로 불리는 파묵갈레, 온천퇴적물이 쌓여 장관을 이룬다. 멀리서 보니 마치 눈이 하얗게 쌓여 있는 것 같다. 온천에 발을 담구어본다. 뜨겁지는 않지만 알맞는 온도다.
다음날, 에페소로 이동하여 사도요한의묘, 사도요한의 성당을 본다.
성모님이 마지막 생애를 보내신집, 감회가 새롭다.
성모님을 뵙고 나오니 바로 앞에 성수가 있다. 그옆에는 한벽에 성모님께 드리는 기도 편지들이 뺵빽히 꽂혀있다 . 우리도 각자의 기도 편지를 성모님께 바친다.
마침 일요일이라 10시30분에 바로 성모님의 집 옆에서 미사를 한단다.
다음 장소로 이동해야 하는데 다들 한 장소를 못 보더라도 미사 참례를 하겠다고 한다.
요령있는 안내원이 미사참례도 하고 스케줄을 조금 빠르게 조절해서 다 보여주겠다고 해 모두 감사한 마음으로 미사를 드린다.
성모님이 머무시던곳에서 이렇게 미사를 드릴수 있다니 이 벅찬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벅찬 마음을 안고 오스트리아의 고고학자가 발견한 에페소 유적지로 이동하여 셀수스 도서관, 음악당, 원형 경기장등을 본다. 행정도시였으며 가로등까지 있다.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걸었던 거리다. 규모가 크고 현재는 많은 부분이 보수되었다고 한다.
이즈미르로 이동해 성 폴리카르포 주교좌성당도 보고나니 벌써 저녁때다.
여섯째날, 트로이지방으로 이동하여 어릴때부터 들어온 트로이전쟁, 트로이 목마를 보는날이다. 독일의 부유한 사업가였던 하인리히 슐레이만이 발굴한 도시로 주요 조사와 발굴은 그의 사후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트로이는 기원전 3천년전에 건설되었고 호머가 일리아드 오딧세이를 쓰면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최고의 문명도시였으며 티이트로 대극장이 있으며 그 당시의 쌓았던 트로이성의 일부 모습을 볼수 있다.
이제, 1차대전의 격전지였던 다르다넬스해협을 건너 그리스로 떠난다.
페리호를 타고 (우리들의 버스도 함께 탄다) 사도 바오로가 첫발을 내딘 네아폴리스 까발라 도착이다. 국경검사가 간단하다. 비자만 보여주면 끝이다. 국경을 통과하려는 수많은 커다란 트럭들이 끝없이 늘어서 있다.국경을 넘어가니 그곳의 여자 안내원이 우릴 기다리고 있다.
사도바오로 기념성당을 보고 호텔로 향한다. 그리스는 사계절이 있고 겨울이 우기철이다. 지진대라서 고층 건물이 없다.
인공호수가 많으며 관광사업으로 산다.선박업은 세계 제1위이며 우리나라가 그리스에 배를 수출한다고 한다. 면, 담배, 대리석, 농수산물들을 수출한다. 부유한 나라로 알았는데 적자로 힘들다고 한다. IMF가 온 이유는올림픽 경기후의 적자로 또 정치가들의 부정부패, 세금탈세, 사회보장제도(그리스인들은 수명이 길다)때문이란다. 국민의 40%가 실업자라고 한다.
특이한 것은 바다에서 비린내가 안 난단다. 이유는 석회질이고 해조류가 없어서이다.
일곱째날이다. 사도 바오로가 유럽에 첫번째로 세운 교회가 있는필립비로 이동하여 필립비교회 유적과 리디아 성당을 본다. 필립비는유일하게 바오로가 물질적 헌금을 받은곳이다. 원형극장, 바실리카A, 바실리카B교회를 본다. 바실리카A는 서기500년경에 지어졌으며 3층의 건물로 직사각형으로 되어있다.바실리카B는 서기 550년경에 씨름장의 돌을 가지고 만들었다고 한다.
중요한 도로였던 에그나띠아라,민주주의의 발상지라는 아고라(광장),바오로가 옷을 찢기고 매맞은 장소도 이곳에있다.
자주색 옷감장사였던 리디아, 물가에 서 바오로사도를 만나 마음의 문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인 여인이다. 리디아가 세례를 받았다는 강가, 그 당시에도 흘렀을 그 물들이 지금도 힘차게 흘러 내리고 있다. 그 물소리를 듣고 있으니 그시절의 여인들의 목소리가 들려올것만 같다.
바오로와 살라스가 갖혀 있었다는 감옥터를 본다. 그 좁은 장소에 어떻게 다른 죄수들과 함께 있을수 있었는지 의문이 든다.
또 다른 바오로기념성당을 보고 로마시대에 수도역활을 했던 데살로니카로 떠난다.
데살로니카는 항구도시로 아테네에서 520km떨어져있다.중병에 걸린 데오디스황제가 이곳에 와서 치유가 된 후 디미트리오스성당을 지었다고 한다.
로마군인에게 순교한 디미트리오스성인의 무덤이 있는 이성당은 1948년 다시 재건축하여 지금은 무덤위에 성당건물이 있다.
디미트리오스정교회 대성당을 본후 메테오라로 이동한다.
다음날, 자연의 경이와 수도자들의 영성이 어우러진 대메테오라수도원을 향한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인 이곳은 처음엔 20여곳이었는데 지금은 6곳밖에 없다.그중에
2곳은 지금 수녀원으로 쓰고 있다. 어마어마하게 높은 절벽위에 지어진 수도원들을 그 시절에 어떻게 지었는지, 어떻게 생활했을지 상상하기도 어렵다.
지금 나는 그저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놀라움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다.
그 풍경들을 눈에 담고 산을 내려온다.
그리스는기원전 3000년 크레타섬을 중심으로 미노아문화에서/크레타문화/미케네(황금의시대)/ 기하학시대(암흑시대,도자기문명만발달됨)/388년에필립2세가그리스문화+아랍문화를섞어버림/로마에게500년간 지배당함/ 395년에 동로마, 서로마로 나누어짐/터키에게400년간 지배당함/1821년에 독립전쟁, 터키와 전쟁을 시작하여 부분적으로 독립했다가 2차전쟁이 끝나고서야 완전 독립됨/1967-1974 군사정권하에 있다가 1974년 국민투표에 의해 그리스민주공화국이 탄생함 . 민주주의 국가가 된지 불과 41년밖에 안된다.
다음날 아테네로 가면서 바오로사도의 전교여행의 거점인 코린토를 본다.
기원전 1800년 페니키아(지금의 레바논)와 교역했던 도시다.
기원전 338년에 마케도니아 필립왕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옥타비니우스황제때 완전복구했다고 한다. 가는 도중 잠깐 내려 고린토 운하를 본다
고린토 운하는 수심8m에 6km의 3대 운하중의 하나로 이 운하로 이탈리아와 거리상으로 가까워졌단다.
또 다른 바오로 기념성당을 보고 고린토 유적지로 향한다. 고린토를 보고 아테네시내로 간다.
아크로폴리스(파르테논신전, 에렉티온신전, 야외음악당) 세계고적1호이다.
세계문화 1호인 파르테논신전은 종교적보다는 정치적,문화적으로 큰 의미를 갖고 있다.
중요한 행사는 파르테논신전보다는 에렉티온신전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어릴때 책에서만 보았던 파르테논신전, 지금은 보수공사를 하느라 조금 느낌은 다르지만
감회는 그 무엇보다도 크다.
신전에서 내려다보이는 아테네시내는 정말 아름답다. 눈에서 떼기가 어려울정도다.
셀레는 마음을 안으며 내려오면서 바오로 사도가 연설했다는 아레오파고스언덕을 본다.많은 관광객등이 올라가 있는 모습을 보니 그 옛날 바오로사도가 말씀하실 때 군중들의 모여 있었을 모습이 저렇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오늘은 샌프란시스코로 떠나는날이다. 어제 출발한 것 같은데 벌써 가야될날이다.
아테네를 출발해 이스탐불 도착 ,이스탐불에서 샌프란시스코 직행비행기를 탄다.
이번 여행에서 얻은 것은 성경에서만 보던 장소들을 실지 보면서, 성경을 읽고 싶은 열망이 강하게 생긴점 이다. 특히 사도행전이다.
성경을 멀리하고 있는 나에게 주님께서 주신 숙제인 것만 같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이스라엘을 방문해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싶다.
이 여행을 준비한 안토니오형제님과 , 모범생 이었던 우리 그룹 형제,자매님들,
무사히 좋은 여행 마치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이정연 골롬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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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한곡 선물합니다. 인생도 이와 같은 여정 이겠지요!
曲과 歌辭가 너무 좋아요 ! 끝까지 感想하시기 바랍니다.
위대한 약속
좋은 집에서 말다툼보다
작은 집에 행복 느끼며
좋은 옷 입고 불편한 것보다
소박함에 살고 싶습니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때론 그대가 아플때도
약속한데로 그대곁에 남아서
끝까지 같이 살고 싶습니다
위급한 순간에 내편이 있다는 건
내겐 마음의 위안이고
평범한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벼랑끝에서 보면 알아요
하나도 모르면서 둘을 알려고 하다
사랑도 믿음도 떠나가죠
세상살면서 힘이야 들겠지만
사랑하며 살고 싶습니다
위급한 순간에 내편이 있다는 건
내겐 마음의 위안이고
평범한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벼랑끝에서 보면 알아요
하나도 모르면서 둘을 알려고 하다
사랑도 믿음도 떠나가죠
세상살면서 힘이야 들겠지만
사랑하며 살고 싶습니다
기사정리/지도작성 및 포스팅: 홍보부 천종욱 다니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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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피아 사원(사진제공: 노 소피아)
블루모스크 성
지하궁전
THE STAFF OF MOSES
신앙생활 을 영위한 돌바위 집
아래의 글은 "성 소피아 성당에 관한 글인데, "가톨릭 뉴스 지금여기"에서 발췌하였습니다
그동안 궁금했던 성 소피아 대성당에관한 상세한 설명을 한상봉 기자님께서 잘 설명을 해두었습니다, 참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이스탄불] 복음을 이긴 비잔틴 제국교회의 상징, 성 소피아 성당
한상봉 기자 | [email protected]
▲ 성 소피아 성당 내부.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어서 순례자와 관광객들이 늘 붐빈다. 성당으로 이슬람 사원으로 종교적 기능을 하던 성당이 이제는 제국의 힘을 건축물로 알아보는 사례로만 남아 있는 듯 해서 보는 이의 마음이 서늘했다. ⓒ한상봉 기자 |
가톨릭신자로서 이스탄불을 방문한다면 가장 먼저 찾는 곳이 성 소피아 성당이다. 성 소피아 성당은 비잔틴제국에서 가장 큰 성당으로, 종교행사뿐 아니라 국가행사도 이 자리에서 치러졌다는 점에서 ‘종교건축의 형식을 빌어 제국의 위용을 드러낸 대표적인 건축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 소피아’란 이름은 그리스도교에서 하느님에게 봉헌한 세 가지 의미 가운데 ‘지혜’를 상징한다. 하느님은 ‘하기야 소피아’ 거룩한 지혜의 원천이며, ‘하기야 이레네’ 거룩한 평화를 주시며, ‘하기야 디나미스’ 거룩한 힘을 지닌 분으로 흠숭되었다.
그러나 한국교회에서 명동성당이 ‘민주화의 성지’이면서 동시에 ‘종교권력의 상징’이듯이, 성 소피아 성당은 정치권력의 지배하에 놓인 교회가 복음적 긴장을 시험받던 장소이기도 했다. 현존하는 성 소피아 성당은 비잔틴 제국에서 같은 이름으로 그 자리에 세워진 세 번째 성당이다. 성 소피아 성당은 360년 2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세웠으나 아르카디우스 황제가 다스리던 404년에 반란이 일어나 시민들이 불태웠다. 이어 두 번째 성당이 415년에 세워졌으나 이 또한 532년 1월 니카의 반란 때 화재로 무너졌다. 지금 세워져 있는 성당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532년 2월에 착공해 537년 12월 26일에 완공한 것이다.
▲중앙 돔과 그 주변의 가브리엘 천사. 중앙 돔 주변에는 40개의 광창을 두었다. ⓒ한상봉 기자 |
그러면 그동안 콘스탄티노플에서 어떤 일이 발생했던 것일까? 그리고 그 사건들이 종교와 정치가 만나는 지점인 성 소피아 성당을 둘러싸고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을까? 궁금하다. 그 열쇠 가운데 하나는 첫 번째 성 소피아 성당이 불타버린 아르카디우스 황제 시절에 활동한 요한 크리소스토모(349년경–407년)에게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제37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였다. 뛰어난 설교자였던 그는 탁월한 설교로 ‘황금의 입을 가진’이라는 뜻의 ‘크리소스토모’라는 별칭이 붙었다. 고대 교회의 중요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교리를 옹호하며 복음적 확신 속에서 부자들을 탄핵했다. 로마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 성공회 모두 그를 성인으로 공경하고 있다.
▲ [ICON] JOHN CHRYSTOSTOM.Chrysostom receiving Gospel from Apostle Matthew. |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안티오키아 출신으로 세상 부귀와 명예가 자신의 복음적 열망을 채워줄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372년에 세례를 받고 수도생활을 했으며,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386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요한은 12년 동안 사제 생활을 하면서 깊은 성서묵상으로 얻은 성찰을 강론 때마다 신자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주었는데, 요한은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비참한 삶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기득권층의 고삐 풀린 사치와 부자들의 탐욕을 끊임없이 고발했다.
“그리스도의 제대가 금으로 된 잔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그리스도(가난한 사람)께서 굶주림으로 돌아가신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먼저 배고픈 이들을 충족히 채워 주고 난 다음 그 나머지 것으로 제단을 장식 하십시오. 여러분은 성전을 장식할 때 고통 받는 형제들을 멸시하지 마십시오. 살로 된 성전이 돌로 된 성전보다 훨씬 가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부자들이 ‘불법으로 가난한 이들의 재산을 약탈하지 않는다면 죄가 없다’고 믿는 데 반대하며, “부자들의 죄는 자기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지 않는 데 있으며, 이는 일종의 강도질”이라고 단언했다. 요한은 우리가 언제든지 죽어서 이승을 떠날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 땅에 영원히 머물 것처럼 착각한다고 말하며, “지금 몸담아 살고 있는 집을 자랑하며 온갖 장식을 하지만, 우리는 잠시 땅에 머물다 가는 나그네”라고 말했다. 요한에게 “우리가 사는 집이란 사실 영생으로 가는 길목의 ‘여관’일 뿐”이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벽이나 머리 위의 지붕에서 평화와 안전을 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스런 은총의 벽에 둘러싸이고 하늘로 지붕을 삼고자 합니다. 사랑으로 이루는 선한 행실이야말로 우리의 살림살이 가구들입니다.”
바로 이 사람 요한 크리소스토모가 398년 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되면서 ‘복음과 권력 사이에’ 긴장이 조성되었다. 요한은 제국교회에 기대어 살던 부패하고 타락한 주교들과 사제들을 면직시켰다. 대신에 요한은 병원과 학교를 늘리고, 교구청의 쓸데없는 장식품과 가구들을 팔아서 가난한 이들을 구제했다. 이 요한 크리소스토모에게 제국의 힘으로 웅장하게 지은 성 소피아 성당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요한 총대주교에게 뜨거운 지지를 보냈지만, 요한의 개혁에 불만을 품은 몇몇 주교들과 적대자들은 조직적으로 저항하며, ‘좋았던 시절’로 되돌아가기 위해서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다. 당시 요한은 설교 때마다 로마제국 황실의 허례허식과 사치를 준엄하게 꾸짖었는데, 이런 태도는 황제권력이 종교마저 장악하고 있던 비잔틴제국에서 용납되기 힘든 도전이었다.
“지금 왕좌를 차지하고 있는 모든 통치자들이 하느님께서 뽑아 세운 자들입니까? 그렇다면 저들이 제정한 모든 법률과 규정이 선한 것이요 따라서 이의 없이 복종해야 할 텐데, 과연 그렇습니까? 대답은 ‘아니’올시다. 많은 통치자들이 주어진 권력을 남용하여 거대한 재산을 모으느라 백성을 착취하고, 저들의 악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부당하게 처벌하며, 이웃나라와 불의한 전쟁을 일으키고 있는 게 현실이지요. 저들의 법이 그릇되었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것에 불복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스리는 최고의 권위는 땅의 법이 아니라 하느님의 법입니다. 만일 이 두 법이 서로 충돌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하느님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중앙의 돔과 이를 떠받치는 반원형 돔이 어우러져 있다. ⓒ한상봉 기자 |
▲ 아래에서 올려다 본 천정 돔. ⓒ한상봉 기자 |
그리스도인이며 주교의 한 사람으로서 요한 총대주교는 ‘복음의 힘으로’ 정치권력을 상대로 예언직을 수행했던 것이다. 요한 총대주교는 특히 에우독시아 황후의 허영심과 탐욕을 비판하고 나섰는데, 평소 요한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알렉산드리아의 테오필루스 주교는 황실과 결탁해 36명의 주교들만 참석한 403년 ‘참나무 주교회의’에서 요한의 주교직을 박탈했다. 결국 요한은 부활전야 미사를 거행하다가 군인들에게 연행당해 아르메니아의 작은 마을로 유배당했다. 그 다음해인 404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는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 성 소피아 성당이 잿더미가 되었다.
결국 요한의 영향력을 두려워한 반대자들이 황제를 부추겨 요한을 흑해 동쪽 해안 피티우스에 있는 한 요새에 유배시키도록 했다. 요한은 넝마를 걸치고 맨발로 유배지로 가다가 탈진해 “모든 것을 통하여 하느님께 영광을”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이승을 떠났다. 407년 9월 14일, 향년 60세였다. 요한 죽기 전에 전한 마지막 강론은 이러하다.
“머잖아,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형제들과 누이들을 떠나야 할 것 같군요. 하느님이 주신 일터에서 나쁜 사람들이 나를 데려갈 겁니다. 나는 지금 슬픕니다. 비통합니다. 화가 납니다. 하지만 절망하진 않습니다. 오히려 희망을 느낍니다. 이 희망의 원천은, 비록 내가 육신으로 형제와 누이들과 이별하지만 영으로는 결코 헤어지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를 입증하십니다.
... 그분이 돌아가신 뒤에 비로소 사도들은 깊은 가슴으로 그분을 알게 되었지요. 마찬가지로 내 육신이 형제와 누이들을 떠날 때 나는 지금 알고 있는 것보다 더 깊게 그들을 알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느끼는 이 슬픔은 녹아내리고, 비통한 감정은 달콤하게 바뀌고, 분노에 찬 이 가슴 또한 어루만져지겠지요. 그 무엇도, 그 누구도, 그리스도 안에 뿌리내린 사랑을 깨뜨려 부술 수 없습니다.”
404년 반란과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죽음 이후에도 불행은 계속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통치하던 532년에 경마장이 있는 히드포럼에서 ‘니카’(승리라는 뜻)의 반란이 일어나 8일 동안 콘스탄티노플을 무정부 상태로 만들었다. 이들은 온 도시의 공공건물을 부수고, 성 소피아 성당에 불을 질렀다. 두 번째 성당이 시민의 반란으로 불타 없어지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집권 5년째 되는 532년에 제국의 영광을 과시하고 황제의 자존심을 걸고 성 소피아 성당을 다시 짓기 시작했다. 제국 각처에서 자재를 운반해 왔으며, 지난 화재로 없어진 성당보다 더 크고, 화재에도 견딜 수 있는 견고한 성당을 지으라고 명령했다. 당시 교회 건축은 민심(民心)과 상관없이 황제의 기호에 따라 결정되었다.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 ⓒ한상봉 기자 |
▲ 성모자 모자이크를 이층에서 좀더 가까이 가서 카메라에 담았다. ⓒ한상봉 기자 |
▲성당을 알라신과 모하메드, 그의 후계자들의 이름을 아랍어로 쓴 7개의 원판이 둘러싸고 있다. ⓒ한상봉 기자 |
5년 10개월만에 성 소피아 성당 낙성식을 열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성당에 들어서자마자 성당의 위용에 감탄해 “예루살렘 대성전을 지은 솔로몬, 당신을 내가 능가했소!”라고 외치며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고 전한다. 어찌 보면 요한 크리소스토모가 추구했던 “성스런 은총의 벽”과 “하늘 지붕”을 걷어내고, “단단한 벽”을 치고 머리에 “돌로 된 지붕”을 덮어놓은 격이다. 이로부터 가난한 백성들이 수시로 얻어 누리던 하느님의 은총이 이제부터는 성 소피아 성당의 주인인 황제와 주교를 통해 내려오게 된 셈이다. 거기서 교리도 정해지고, 교회법도 정비되고, 종교예식과 대관식도 열릴 참이다.
성 소피아 성당은 수학자이며 물리학자인 안테미우스와 기하학자인 이시도루스의 합작품이다. 성당은 중앙에 ‘영원’을 상징하는 직경 32.5m의 둥근 돔이 있고, 바닥은 ‘세상’(땅)을 상징하는 사각평면에 네 개의 기둥을 두었다. 15층 건물 높이의 성당은 커다란 돔을 무게를 받치기 위해 서쪽과 동쪽에 반원형 돔을, 북쪽과 남쪽에 육중한 버팀벽을 세웠다. 성당의 총면적은 7,570㎡이며, 중앙 돔 정점까지 높이는 바닥에서 56.6m이다.
중앙 돔에 있는 40개의 창을 통해 햇빛이 성당 안에 들어오게 하고, 창유리 대신에 대리석 투조판(透彫板)을 사용했다. 성당 안은 기둥을 많이 쓰지 않아서 엄청나게 넓어 보이며,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면 거대한 규모의 돔 때문에 압도당하는 느낌이다. 아마도 동시대 사람들은 이 천정을 바라보며 하느님의 엄청난 권위(하기야 디나미스, 거룩한 힘)과 황제의 위용을 감당하며 다른 인간 생애의 보잘 것 없음을 맛보았을 것이다. 여기서 당연히 발생하는 감정적 반응이 ‘복종’이다.
▲ ⓒ한상봉 기자 |
▲ 오른쪽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새로운 도시 콘스탄티노플을, 왼쪽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성 소피아 성당을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하고 있다. 이 사진은 현지에서 구입한 한글판 <이스탄불> 안내책자에 실린 것이다. |
성 소피아 성당은 비잔틴 제국 916년 동안 성당으로, 오스만제국 481년 동안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었으며, 터키공화국을 세운 무스타파 케말은 1934년에 성 소피아 성당을 박물관으로 지정해 ‘아야 소피아 박물관’으로 부르고 있다. 다행히 1453년 오스만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도 성 소피아 성당의 위용에 압도되어, 성당을 파괴하지 않았다. 이들은 모자이크로 된 성화들을 회칠하고, 성당 건물 바깥에 네 개의 미나레(이슬람사원의 첨탑)를 세워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했다. 터키공화국 건국 이후에는 박물관이 되면서, 회칠을 일부 벗겨내 비잔틴 성화를 복원했다.
성 소피아 성당에 남아 있는 성화는 대개 9세기 이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레오 3세 황제가 ‘우상숭배’라 하여 궁전 문에 있는 성상을 철거하도록 명령을 내리면서 727년부터 843년까지 성상파괴운동이 비잔틴제국에서 일어났다.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이 분리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그림이나 성상으로 표현하면 ‘인성만을’ 표현하게 되고, 더구나 이를 숭배하는 것은 그리스인들이 행하던 우상숭배를 재현하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이 기간 동안 동로마(비잔틴)교회에서는 성당 벽에서 성화들이 사라지고, 벽화나 모자이크가 금지되었다. 당시 동로마교회의 성상파괴령은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서로마(라틴)교회와 동로마교회가 분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서로마교회는 성화를 허용했기 때문이다.
▲ 성당 이층으로 올라가는 통로는 계단이 아니라 비스듬한 경사로로 되어 있다. 황후가 가마를 타고 올라가서 미사에 참석하던 길이다. ⓒ한상봉 기자 |
▲ 이층 오른쪽 복도에 있는 최후의 심판에 관한 모자이크. 성모 마리아와 세레자 요한이 예수를 가운데 두고 서서 인간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한상봉 기자 |
▲ 황제 콤네노스 2세가 황후 이레네와 함께 예수에게 봉헌하고 있는 모자이크. ⓒ한상봉 기자 |
▲황제 콘스탄티누스 모누마쿠스 4세와 황후 조에가 예수에게 헌금을 봉헌하고 있는 모자이크. 정양모 신부는 예수의 눈동자가 황후에게로 쏠린 것을 지적하며 "예수님도 여성에게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라며 농담을 던졌다. ⓒ한상봉 기자 |
성 소피아 성당은 오스만제국이 이슬람사원으로 개조하면서 현재 성당 내부에 소형 건축물이 추가되었는데, 성당 중앙 안쪽에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 성지 메카를 상징하는 ‘미흐랍’이 있고, 오른쪽에는 이슬람 예배시 기도를 안내하는 사람인 ‘무에진’이 사용하는 기도대, 왼쪽에는 오스만 술탄을 위해 1849년에 만든 옥좌가 있다. 또한 성당 위편 사방에는 알라신과 모하메드, 그의 후계자들의 이름을 아랍어로 쓴 7개의 직경 7.5m 원판이 걸려 있다.
성당 안쪽 돔에는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의 모자이크와 가브리엘 천사의 모자이크가 남아 있다. 이 가브리엘 천사는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모하메드에게도 신의 계시를 알렸다. 2층에 올라가면 요한 크리소스토모와 이그나티우스 테오포루스의 모자이크가 있고, 그밖에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콘스탄티노플 도시모형을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에게 봉헌하고,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성 소피아 성당 모형을 봉헌하는 모자이크도 있다.
성 소피아 성당에 남아 있는 유물 가운데 역설적인 것은 이층 회랑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놓인 ‘HENRICUS DANDOLO’라고 쓰여진 금속판이다. ‘단돌로’는 베네치아 총독으로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에 나선 라틴 기사들을 부추겨 같은 무슬림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비잔틴제국인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 함락시킨 장본인이다. 단돌로는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에게 엄청난 세금을 거둬 베네치아로 가져갔으며, 성 소피아 성당에 있던 성물과 성상도 찬탈해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성당을 꾸미는 데 썼다. 1205년에 죽어서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공로를 인정받아 시신이 성 소피아 성당에 묻혔다. 그러나 1261년에 비잔틴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다시 탈환해 단돌로의 석관묘를 파헤치고, 그의 유골을 거리의 개에게 던져주었다.
역사적으로 1453년 5월 28일, 오스만제국의 메흐메드 술탄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기 직전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미사가 봉헌된 곳도 성 소피아 성당이다. 비잔틴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자정에 성당에 입당해 콘스탄티노플의 평화를 간구하는 기도를 올렸다. 평화의 기도는 밤새 올려졌으나, 오스만제국 군대의 함성과 포성에 놀란 시민들이 성당으로 피신해 오고, 5월 29일 동틀 무렵에 성벽이 무너지고 도시가 함락되었다. 그 후 성 소피아 성당에서는 아직까지 단 한 차례도 미사가 봉헌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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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소피아 성당 전경. ⓒ한상봉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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