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2012년 9월 11일 (화)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열둘을 뽑으시고 그들을 사도라고 부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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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랙9/16/2012주보/ 생명의 말씀-고통을 피하려는 사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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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                          
 
고통을 피하려는 사탄
 

불가(佛家)에서는 생로병사를 모두 고통이라 말합니다. 사실 인생에는 행복한 일보다 고통스러운 일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행복이 더 간절한 것이겠지요. 질량보존의 법칙처럼 세상에는 일정량의 고통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생명으로 태어나 내가 받아야 할 고통, 남이 받아야할 고통이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더 불행한 사람, 더 행복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군가고통을 더 받거나 덜 받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남에게 고통을 덜어주는 사람입니까? 더해주는 사람입니까? 우리는 더 고통 받을 때면 그것을 이웃을 위해 하느님께 봉헌하고, 더 행복하다면 이웃에게 미안해하며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부유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로 양극화 현상이 심해지는 우리 사회기에, 고통분담과 행복 나눔이 더 절실해졌습니다. 더불어 살아야 하는 이 사회에 몸담고 있는 이상 우리에게는 고통분담과 행복 나눔의 책임이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믿고 고백하는 신앙인들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을 위해 고통의 십자가 길을 가신 분입니다. 믿는 것만으로는,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정말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없이 구원을 바라는 것은 사탄의 짓이라고까지 하셨습니다. 그분은 세상의 십자가를 짊어지신 하느님의 어린양으로서 정말 큰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우리의 삶은 과연 어떠합니까? 남의 십자가는 커녕 매일 자기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까지도 버거워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고통을 피하고 복을 얻으려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의 의미를 잘 터득하여 내게 다가오는 고통을 잘 받아 안고, 남의 고통까지도 함께하기 위해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고통을 잘 겪어 내면 힘이 생기고, 그 힘이 바로 남의 고통까지도 함께할 수 있는 힘입니다. 고통을 이기는 힘이 바로 사랑할 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모욕과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말씀까지 하셨나봅니다.
 
신앙인의 삶은 고통을 피하는 요령을 배우고 자기만의 행복을 누리는 그런 삶이 절대 아닙니다. 고통을 자꾸 피하면 약해질 뿐이고 혼자만의 행복은 외로움을 견디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멍에를 편하게 해준다고 하셨지 없애 준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아흔아홉 마리 양이 있어도 잃어버린 한 마리 양과 함께 할 수 없는 것을 더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혼자의 행복보다 차라리 함께하는 고통을 원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고통을 겪어본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며, 고통을 이겨낸 사람만이 고통이 따르는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소중한 재물, 편안한 시간 등을 포기하는 아픔과 오해받고 무시당하는 고통까지도 감수해야 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부디 우리가 마땅한 자기 고통을 받아 이겨내고, 남의 십자가까지 함께 질 수 있음으로써 예수님을 올바로 따르는 제자, 하느님의 충실한 종이 될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예수님께 기쁨을 드리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신앙인의 참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고찬근 루카 신부┃서울대교구 성소국장
 
 


             굳어진 습관이
       십자가를 지는 데 큰 장애가 된다.
   글_대 바실리우스 / 그림_구민정 엘리사벳

 
 
 
 

Submitted by catharinajin on Fri, 09/14/2012 - 18:52


말씀의 향기                    
 
사람을 죽이는 칼, 살리는 칼 2
 

서슬이 퍼런 스승의 선기에 압도되어 버린 대중들은 입조차 달싹 못하고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 남전은 그 자리에서 고양이의 목을 베어 죽였습니다.
외출에서 돌아온 제자 조주(趙州)가 인사하러 왔을 때, 남전은 낮에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고 ‘네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조주는 말없이 자신이 신던 짚신 한 짝을 머리 위에 얹고 걸어 나갔습니다. 이에 스승 남전이 혀를 차며 말하였습니다.
“네가 있었더라면 고양이는 살 수 있었을 터인데.”그 이후부터 ‘불살생’의 계율을 파계하여 고양이의 목을 벤 남전의 칼은 애욕을 끊기 위한 ‘사람을 죽이는 칼(殺人刀)’이며, 그것이 분쟁의 원인인 고양이라 할지라도 하찮은 짚신조차 머리 위에 떠받드는 것처럼 섬기겠다는 조주의 칼은 ‘사람을 살리는 칼(活人刀)’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근세의 선승 혜월(彗月)은 1937년 죽기 전 선암사에 주석하고 있었는데, 그에게는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천하의 명검’이 있다는 소문이 자자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헌병대장이 보고 싶은 욕망에 절을 찾아왔습니다. “그 칼을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라는 간청에 “물론입니다.” 하고 앞장서 걷던 혜월은 느닷없이 뺨을 후려쳐 헌병대장을 섬돌 아래로 떨어뜨렸습니다. 졸지에 수모를 당한 헌병대장이 허리에 찬 칼을 빼려 하자 혜월이 먼저 다가가 그를 부축하여 일으키면서 말하였습니다.
“이것이 내가 갖고 있는 천하의 명검이요. 내가 때려 섬돌 아래로 떨어뜨린 손은 사람을 죽이는 칼이며, 부축하여 일으켜 세운 손은 사람을 살리는 칼입니다.”
 
길고 긴 투병생활이 시작되었을 때, 저는 의사처럼 소중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경에도“의사를 존경하여라. 너를 돌봐 주는 사람이요, 또한 주님께서 내린 사람”(집회서 38,1)이다. “그들은 그들대로 주님께 기도를 올려 환자의 고통을 덜고 병을 고치는 은총을 빈다. 그렇게 하여 환자의 생명을 건지는 것이다.”(집회서38,14)라며 의사들을 「주님께서 내린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2010년 3월 저는 두 번째로 방사선치료를 하게 됐을 때 화학치료를 병행할 것인가에 대해서 어떤 의사와 상의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 의사는 냉정하게 말했습니다. 올가을까지만 사신다 생각하시고 마음 준비를 하시지요.”이른바 시한부 선고였습니다. 젊은 의사는 과학적 의술에 의한 임상학적 판단으로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히려 그 의사가 측은하게 느껴졌습니다. 왜냐하면 그 의사는 제 생에 대한 미련 같은 것을 끊어버림으로써 고양이의 목을 베었는지는 모르지만 ‘고양이로서의 환자(?)인 저’는 살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의사가 하느님을 믿든 안 믿든 그의 의술은 ‘왕(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예물’(집회서 38,2)이며, 생명은 그가 다루는 지식이 아닌 하느님의 신비한 섭리임을 몰랐던 것입니다. 하찮은 짚신까지도 머리 위에 섬기듯 환자를 사랑하고 아끼며 생명을 다루는 의사들은 병든 부위를 도려내는 수술 칼로 사람을 살리는 칼을 쓰는 성직자입니다. 따라서 의사는 환자들을 희망과 용기로 부축하여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이처럼 의사들만이 아닌 모든 사람이 다루는 정치, 경제, 법, 언론, 제도에는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사람을 살리기도 하는 양면의 칼날이 들어 있습니다. 두 개의 칼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칼에서 비롯되며 그 칼이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것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주님, 제 혀와 손과 생각은 모두 양면의 날을 가진 불칼임을 제가 아나이다. 제 혀끝에서 비난과 독설, 거짓말과 고함 소리를 베어내 주시고, 제 생각에서 교만과 독선, 자애심을 끊어주시고, 제 손에 쥔 붓에서 퇴폐와 부도덕과 파괴를 유혹하는 독소를 씻어내 주소서. 그리하여 제가 최후의 만찬을 시작하기 전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고 허리에 두르셨던 수건으로 닦아주셨던’(요한 13,5)주님을 본받아 사람을 섬기는, 사람을 살리는 평화의 칼이 될 수 있도록 은총
내려주소서.
             -  성경 인용은 공동번역 성서입니다.-
 
                         최인호 베드로 / 작가
 
 
 

머무름
 
“만일 주님께 가까이 가기 바란다면,
자신을 비우는 데 있어
주님의 도움에 의존해야 한다.
 
           글_타이완의 산궈스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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